2012년 7월 19일 목요일

고 김근태의 용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 김근태가 인터뷰한 내용중에서 "자신은 자신을 고문한 사람들을 용서했다" 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아량이라던가 위대함이라던가 뭐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용서'에 대한 내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본인이 용서하겠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고문을 당할 당시 고문하는 사람들의 처자식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도 일반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용서했다 는 말을 들으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신념을 유지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반감으로 유지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념이 선하고 진실이며 상대방의 신념이 악하고 거짓이다 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하기도 한다.

그런데 고문을 하면서 죽음을 걱정하고 지쳐 쓰러져 있는 사람 앞에서 처자식을 걱정하고 일상적인 이야기,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일 뿐이다 라는 느낌을 전달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것을 듣는 고문 피해자는 어떻게 될까.

육체적인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도 심리적인 작전에는 흔들리게 되어 있다.
특히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태라면 심리적으로 무너지기는 더욱 쉽다.
그런 상태에서 만약 상대방도 나와 같고 그도 진실이고 나도 진실이고 그 역시도 나와 같이 약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정말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저 멀리 사라져버리고 자신이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고문 피해자는 분노가 아닌 연민을 갖게 되고 그 순간부터 자신 역시도 투사가 아닌 연민의 대상이며 불쌍한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에게 맞는 기분 만큼 처참한 것도 없다.

당신은 아주 가끔 이런 적은 없었는가.
나는 충분히 싸울 의지를 가지고 있는 데 상대방이 불쌍하거나 너무 약해서 조용히 물러난 적은 없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고 상대방이 믿고 있는 것이 거짓임을 알지만 그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 또는 그 사람과의 싸움을 원하지 않아서, 내 신념과 내가 믿고 있는 진실이 거짓으로 포장되고, 그 자리에서 해명하지 않으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쓸쓸히 뒤돌아선 적은 없는가.

나는 고 김근태가 자신을 고문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에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용서를 강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위대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신념은 갖고 있지 않다.

악은 악으로 상대했을 때만이 비로서 악이 없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진실이다.
악을 용서했을 때 악은 편안히 잠들지만 악을 악으로 응징했을 때 악은 비로서 두려움을 갖고 자신의 과거를 후회한다.
또한 선한 자는 원래 독한 자들이 지켜주는 것이다.
선한 자를 선한 자들이 지켜준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