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율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마니아를 양산한 드라마.
죽음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 드라마.
그 전의 드라마와는 완전히 달랐던 드라마.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드라마.
이 드라마 전의 양동근 모습은 시트콤에서의 까불이가 전부였다.
양공주 였는지, 흑인군인과의 성관계로 태어난 혼혈아로 출연한 영화(제목 기억 안 남)에서의 연기를 보면서도 깜짝 놀라긴 했었지만(시기가 드라마 전인지 후인지도 기억 안 남)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의 연기를 보면서도 많이 놀랐는데, 내 기억 속에서 양동근은 까불이에서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의 삶을 살다가 힙합가수로의 삶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다.
나에게도 적잔이 영향을 끼쳤었다.
정말 죽음이 내 목전에 있다면 난 어떤 삶을 선택할까.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만족하고 그대로 살까.
아니면 다른 삶을 선택할까.
지금 나는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정말 많은 생각을 했던 드라마고 많은 것을 느끼게 했던 드라마였다.
지금 집사람의 아버지, 장인어른이 간암으로 수술을 받으셨다.
집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네 멋대로 해라'를 적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집사람이 없다면, 엄마가 없다면,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떨까.
참, 이번에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또 한 가지 느낀게 있었는데, 가진 자의 옹졸함과 없는 자의 쿨 함이 그것이다.
고복수를 쫓다가 손가락을 다친 형사는 고복수를 때림으로 쿨하게 복수를 끝낸다.
고복수는 쿨하게 맞는 걸로 용서를 구하고.
고복수의 전 애인 역시도 마지막에 쿨하게 포기한다.
전경의 아버지 어머니, 고복수의 아버지 어머니, 고복수의 친구 의사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대조적이게 전경의 전 남자 친구만이 끝까지 쿨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새 여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전경 앞에서 자랑하는 그런 모습.
어쩌면 실제 삶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실제 삶에서는 '네 멋대로 해라'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지금껏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엄청난 희생이 필요한 데다가 그것을 주위 사람들이 쉽게 용인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기도 하고 때론 어떤 이유에서 자신을 죽이거나 미루고 타인을 위한 무언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항상 내게 외치는 목소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네 멋대로 해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항상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라. 그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타인을 위하는 방법이다. 자신을 포기하고 힘겹게 사는 것은 자신도 괴롭지만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괴롭다. 어차피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희생이 옆사람 때문이라고 불만을 갖고 있지 않은가. 설령 불만이 없더라도 그 삶을 지켜보는 사람은 너무 부담스럽고 죄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러니 네 멋대로 네가 원하는 데로 너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한 삶을 살아라."
이것은 내가 집사람에게 바라고 말하는 삶이다.
이것은 어머니가 내게 바라고 말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어머니에게 바라고 말해왔던 삶이었다.
그럼에도 나도 집사람도 어머니도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가 아직도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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