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교도적인 삶을 원하거나 이성을 멀리하거나 절대적인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서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은 '소유욕'의 다른 말일 뿐이고 '집착'의 다른 말일 뿐이고 허상이라고 믿었었다.
구속과 간섭을 싫어했고 타인을 신경쓰면서 사는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거추장스러운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사는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을 해서도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싶어했고 통제받기를 거부했고 '친구같은 부부'가 이상적인 부부이며 오래도록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살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좋아서 한 결혼이었음에도 약간의 거리는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집사람은 그런 내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좋을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다툴 때가 많았다.
나는 그것을 당연히 치뤄야하는 통과의례쯤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집사람은 점점 지쳐갔고 내 마음도 처음과 같지 않게 됐다는 것을 '큰 일'을 치루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
집사람은 나의 '친구 같은 부부'에 대한 환상이 다른 의도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생각을 바꾸려 노력했고 내 마음을 바꾸려 노력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에도 바뀌지 않자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으려 했다.
나는 그제서야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고 끊임없이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알렸고 다시는 외롭지 않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사랑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사랑은 집착의 다른 말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집착이 생기는 것이고 집착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생기지 않고 내 사람에 대한 소유욕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친구같은 부부는 없다.
그것은 이미 사랑에 대한 감정이 식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내가 그녀의 투정을 받아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녀의 투정을 받아주게 된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다른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지금 나는 집사람의 집착에 감사하고 나 역시도 집착한다.
그녀의 구속과 소유욕이 당연하다 말해주면서 나 역시도 그녀를 구속하고 소유한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하려하고 있고, 내가 했던 많은 것들을 하지않으려 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부부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배우자의 어떤 점이 싫어 당신이 멀리한다면 당신 대신에 어떤 사람이 그 점을 끌어안을 것이고 그 순간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 곁을 떠날 것입니다.
내 몫을 내가 다하지 않으면 나를 대신할 누군가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면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겁니다.
서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좋아서 부딪히고 싫어서 부딪히면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겁니다.
부부는 절대 동업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부부는 부부입니다.